전기요금 고지서를 보고 현실이 달라졌다고 느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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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리모컨을 괜히 내려놓게 되던 밤이었다 어느 날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던 밤이 있었다. 창문은 열어놨는데 바람은 안 들어오고, 눅눅한 여름 냄새만 방 안에 가득 남아 있었다. 작은 식탁 위에 우편물 몇 장 올려놓고 하나씩 보다가 전기요금 고지서를 펼쳤다. 그런데 숫자가 눈에 딱 들어오더라. 순간 잘못 본 줄 알았다. 다시 봐도 금액은 그대로였다. 괜히 에어컨 리모컨부터 내려놨다. TV 소리는 작게 나오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집안이 갑자기 조용해진 느낌이었다. 솔직히 그날 이후로는 에어컨 버튼 누를 때도 한번 더 생각하게 됐다. 그전까지는 그냥 열심히 살면 어떻게든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생활이라는 게 생각보다 작은 숫자들에 흔들린다는 걸 그때 처음 느꼈다. 밤늦게 불 끄던 학원 복도가 아직 기억난다 그 시절 학원 운영할 때도 여름 전기요금은 늘 부담이었다. 대치동 학원가는 밤이 늦어도 완전히 조용해지지 않았다. 11시 넘으면 학생들 하나둘 내려오고 학부모 차가 골목 끝에 잠깐 멈췄다가 다시 빠져나갔다. 교실 안은 더웠다. 에어컨 계속 돌고 CRT 모니터 열까지 올라오면 복도 공기가 후끈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얇은 모니터가 아니었다. 컴퓨터 한 대만 오래 켜놔도 뒤쪽에서 열기가 확 올라왔다. 학생들 다 보내고 혼자 남아 형광등 하나씩 끄는데, 이상하게 탁 하고 불 꺼지는 소리가 크게 들리던 날들이 있었다. 괜히 전기 아껴야 할 것 같아서 복도 불도 빨리 껐다. 막상 해보면 학원 운영이라는 게 거창한 사업 느낌보다 생활에 가까웠다. 전기요금, 월세, 복사용지 값, 컵라면 값 같은 게 하루 종일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어떤 학부모는 상담 끝나고 나가면서 “요즘은 집에서도 에어컨 마음 놓고 못 틀겠어요” 하고 웃듯 말했는데 표정은 전혀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때는 왜 다들 그렇게 조용히 생활비 이야기를 했을까 싶다. 고지서 한 장이...

공장 야간근무 끝나고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한 이유

저는 솔직히 그 시절에는 내가 컴퓨터를 배우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공장 야간근무 끝나고 나오면 몸이 축 늘어졌다. 새벽 공기 맞으면서 걸어가는데, 이상하게 길이 더 길게 느껴졌다. 공장 안에서는 하루 종일 기계 돌아가는 소리 듣고 같은 동작 반복하고, 정신없이 시간 보내다가 아침 해 뜨는 걸 보고 퇴근했다. 그때는 그냥 먹고사는 게 먼저였다.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이상하다. 아무 생각 없이 버티다가도 갑자기 다른 길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나한테는 그게 컴퓨터였다.

그 시절에는 컴퓨터가 참 멀게 느껴졌다

처음 컴퓨터 이야기를 들은 건 공장 쉬는 시간이었다. 같이 일하던 형 한 명이 있었는데, 담배 피우면서 자꾸 컴퓨터 학원 이야기를 했다. O/S가 어떻고, 프로그램이 어떻고 하는데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그때는 컴퓨터가 지금처럼 흔한 것도 아니었다. 집에 개인컴퓨터가 있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괜히 어려운 사람들만 배우는 느낌이 있었다.

나는 속으로 “이 나이에 무슨 컴퓨터냐” 싶었다. 손에는 기름 냄새 배어 있고, 밤새 일하고 나오면 눈도 제대로 안 떠졌는데 무슨 공부인가 싶었던 거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형 말이 자꾸 생각났다. 집에 와서 씻고 누우면 머릿속이 조용해야 하는데, 괜히 다른 생각이 돌았다. 내가 평생 지금 하는 일만 하다가 끝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무서웠던 건 일이 힘든 게 아니라, 앞으로 달라질 게 없다고 느껴지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처음 컴퓨터학원을 찾던 날

결국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낮에 컴퓨터 학원 상담을 갔다. 눈은 뻑뻑했고 몸은 무거웠다. 솔직히 문 앞에서 그냥 돌아갈까도 고민했다. 안에 들어가니까 오래된 CRT 모니터가 줄지어 있었고,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분위기가 괜히 낯설었다.

처음엔 코당하는 것도 어색했다. 요즘 사람들은 웃을 수도 있는 일인데, 그 시절에는코딩시트를 책상 위에 두고 코딩하는 작업을 어려워 하는 사람도 많았다. 수정하는 것도 헷갈렸고, 프로그램 실행도 쉽지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그 시간이 싫지는 않았다. 피곤한데도 뭔가 새로 배우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하나씩 알게 될 때마다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 단순히 컴퓨터를 배운 게 아니라, 내가 아직 완전히 멈춘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학원에서 먹고 자며 버티던 시절

그 뒤로는 흐름이 조금 달라졌다. 야간학교 다니던 시절처럼 잠 줄여가며 시간을 쪼개 쓰게 됐다. 군대 있을 때 FDC 보직하면서 숫자 계산표 보던 기억도 괜히 떠올랐다. 그때도 처음엔 하나도 모르겠는데 계속 보다 보면 조금씩 익숙해졌었다.

컴퓨터도 비슷했다. 코볼이니 포트란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머리가 아팠는데, 또 며칠 붙잡고 있으면 이상하게 손이 먼저 움직였다. 밤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낮에는 학원에서 졸면서 배우던 때였다. 솔직히 몸은 늘 피곤했다. 그런데 희한하게 마음은 예전보다 덜 막막했다.

나중에는 학원 강사 일도 조금씩 하게 됐다. 처음 칠판 앞에 섰을 때는 손에 땀이 났다. 학생들 앞에서 설명하는데 목소리가 자꾸 떨렸다. 수업 끝나고 혼자 교실 남아서 칠판 다시 지우고, 또 설명 연습하고 그랬다. 학원에서 그냥 먹고 자던 날도 있었다.

그 시절에는 컴퓨터보다 사람이 더 기억난다. 취업 때문에 학원 오던 사람들, IMF 지나고 다시 배우러 오던 아저씨들, 아이 학원 보내놓고 옆에서 인터넷 배우던 주부들. 다들 사정 하나씩 안고 왔다. 그래서인지 수업 분위기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기술보다 사람이 더 크게 남았다

MS-DOS에서 윈도우로 넘어가던 시절도 기억난다. 처음엔 다들 검은 화면만 보다가 마우스로 창 움직이는 걸 신기해했다. 저장 하나 잘못 눌러서 화면 날아가면 교실이 조용해지기도 했다. 지금 보면 별거 아닌데, 그때는 다들 진지했다.

참 신기했던 게 있다. 컴퓨터를 배우러 온 사람들 대부분이 처음부터 꿈이 거창했던 건 아니었다는 점이다. 나처럼 그냥 다른 길이 있을까 싶어서 온 사람도 많았다. 먹고살려고, 취업하려고, 시대가 바뀌는 것 같아서 불안해서. 이유는 조금씩 달랐지만 분위기는 비슷했다.

나도 온라인 교육 같은 걸 나중에 도전해봤지만 처음엔 실패를 많이 했다. 기술은 계속 바뀌는데 사람 마음은 그렇게 빨리 안 변한다는 걸 그때 느꼈다. 결국 오래 남는 건 화려한 기능보다, 누군가 포기하지 않게 붙잡아주는 분위기 같은 거였다.

지금 돌아보면 결국 버티는 이야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장 야간근무 끝나고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한 이유가 대단한 꿈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계속 똑같이 살까 봐 무서웠던 마음이 더 컸다. 사람은 몸이 힘든 것도 힘들지만, 앞으로 달라질 게 없다고 느낄 때 더 지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배우는 걸 꼭 성공이랑 연결해서 보지는 않는다. 새로운 걸 배운다고 인생이 갑자기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나도 그걸 겪어봤다. 그런데 적어도 마음 한쪽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게 생각보다 사람을 오래 버티게 만든다.

가끔은 새벽 공장 냄새 같은 게 아직도 떠오른다. 졸린 눈으로 학원 문 열던 순간도 생각난다. 그 시절에는 참 막막했는데, 또 어떻게든 하루하루 이어갔다. 아마 그래서 지금도 컴퓨터 이야기보다 그 안에 있던 사람들 얼굴이 먼저 떠오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함께 보면 흐름이 더 잘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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