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026의 게시물 표시

첫차 기다리는 사람들 표정에서 묘한 공통점을 느꼈던 이유

이미지
새벽 네 시가 조금 넘은 천호동 골목은 낮에 보던 동네와 전혀 달랐습니다. 그때만 해도 주변에 논이 남아 있어서 겨울 새벽이면 골목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꽤 매서웠습니다. 집을 나설 때는 아직 한밤중처럼 깜깜했고, 가방을 메고 걷다 보면 제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습니다. 저는 그 시간에 종로 쪽 새벽 단과학원에 가기 위해 첫차를 탔습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니던 때였습니다. 거기에 새벽 공부까지 하려니 잠이 늘 부족했습니다. 그래도 대학에 가고 싶다는 마음 하나 때문에 졸린 눈을 비비며 정류장으로 걸어갔습니다. 가로등 아래 사람들이 하나둘 모였다 정류장에 도착하면 저보다 먼저 나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많은 사람이 서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 명이 오고, 조금 있다 또 한 명이 오면서 어느새 몇 사람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작업복 차림으로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사람도 있었고, 작은 가방을 가슴에 꼭 안고 있는 아주머니도 있었습니다. 밤새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인지, 저처럼 이제 하루를 시작하러 나온 사람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 시간에는 이상할 정도로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류장 기둥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서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입김이 하얗게 나올 때마다 어둠 속 얼굴이 잠깐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저도 그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아마 다른 사람이 저를 봤다면 저 역시 비슷한 얼굴이었을 겁니다. 가방을 메고 있으니 학생처럼 보였겠지만 속사정까지 알 수는 없었을 겁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녔고, 새벽에는 종로까지 공부하러 갔습니다. 잠을 충분히 잘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첫차에 타면 책이라도 조금 봐야겠다고 집을 나설 때마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버스 문이 열리고 따뜻한 안으로 들어가면 생각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빈자리에 앉아 책을 꺼내도 몇 장 넘기지 못하고 눈꺼풀이 무...

첫 마라톤 출발선 앞에서 괜히 긴장됐던 기억

이미지
운동화 끈을 또 한 번 당겨 묶었다. 이미 두 번이나 확인했는데도 왠지 헐거운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처럼 준비하는 사람도 있었고, 웃으며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아직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 않은 새벽이었다. 입김은 하얗게 흩어졌고, 차가운 공기 속에서 사람들의 발걸음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출발 시간까지는 조금 남아 있었지만 출발선 근처는 어느새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스트레칭을 하는 사람, 가볍게 뛰며 몸을 푸는 사람, 이어폰을 낀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사람까지 모두 자기만의 방식으로 출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괜히 나만 긴장한 것 같았다 그날은 이상하게 모든 소리가 크게 들렸다. 사회자의 안내 방송도 또렷했고, 번호표를 만지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까지 귀에 들어왔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침착해 보였다. 그런데 나만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솔직히 달리는 것보다 출발을 기다리는 시간이 훨씬 힘들었다. "과연 끝까지 갈 수 있을까."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기록도 모르고 코스도 낯설었다. 사람들 사이에 서 있으니 내가 가장 초보처럼 느껴졌다. 막상 지나고 보니 첫 마라톤은 다리보다 마음이 먼저 긴장하는 경기였다. 출발 신호를 기다리던 짧은 순간 출발 직전이 되자 주변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수백 명이 함께 서 있었지만 모두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손목시계를 눌렀고, 누군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도 괜히 따라 크게 심호흡을 했다. 참 신기했던 게 그 짧은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아직 한 걸음도 뛰지 않았는데 심장은 이미 결승선 근처까지 달려간 것처럼 뛰고 있었다. 출발선만 넘으니 마음이 달라졌다 출발 신호가 울리자 사람들은 한꺼번에 뛰지 않았다. 처음에는 걷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앞사람 등을 따라 조금씩 발을 옮기다 보니 신기하게도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응원하는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렸고, 길가에서 손을 흔들...

새벽 공장 출입문 앞 묵묵히 걸어 들어가던 사람들

이미지
공장 출입문 앞 가로등은 아직 꺼지지 않고 있었다. 하늘은 검푸른 색에 가까웠고, 겨울 새벽 공기는 코끝을 찌르듯 차가웠다. 그 시간에 길을 걷는 사람들은 말이 많지 않았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사람, 목도리를 코밑까지 올린 사람, 도시락 가방을 손에 든 사람들이 하나둘 공장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때는 새벽 다섯 시가 되기 전에 집을 나서야 했다. 아직 동네 불빛도 제대로 켜지지 않은 시간이었고, 버스 정류장에도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공장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은 늘 비슷한 시간에 나타났다. 서로 얼굴은 알지만 긴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짧게 “왔어?” 하고 인사만 하고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 말없이 모이던 사람들이 있었다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공장 출입문 앞에는 자연스럽게 줄이 생겼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다들 자기 시간이 몸에 배어 있었다. 늦으면 안 된다는 생각,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얼굴에 묻어 있었다. 솔직히 그때는 그런 풍경이 너무 당연했다. 먹고살려면 일해야 했고, 일하려면 새벽에 일어나야 했다. 춥다고 안 갈 수도 없고, 피곤하다고 빠질 수도 없었다. 얼굴에는 잠이 덜 깬 표정이 남아 있었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상하게 기억나는 건 그 조용함이다. 시끄러운 말보다 발걸음 소리가 더 크게 들리던 새벽이었다. 공장 안보다 출입문 앞이 더 오래 남았다 공장 안으로 들어가면 분위기는 금방 달라졌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작업 준비가 시작됐다. 장갑을 끼고, 옷매무새를 고치고, 각자 맡은 자리로 흩어졌다. 그런데 막상 시간이 지나고 보니 작업장 안 모습보다 출입문 앞 풍경이 더 오래 남아 있다. 해도 뜨기 전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걸어 들어가던 뒷모습 말이다. 젊은 사람도 있었고 나이가 지긋한 사람도 있었다. 누구는 도시락 가방을 들고 있었고, 누구는 낡은 작업복 위에 두꺼운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특별한 말은 없었지만 각자 집에서 두고 온 사정이 있었을...

대치동 학원가 새벽 불빛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던 날

편의점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따뜻한 공기가 잠깐씩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 앞에 서 있던 학생들은 종이컵 음료를 손에 들고 있었지만 평소처럼 시끄럽지 않았다. 겨울 끝자락의 차가운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시험을 앞둔 마음 때문이었는지 다들 말수가 적었다. 이상하게 그 장면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날도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강의를 마치고 상담을 하고, 학부모 전화를 받고, 교실을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유리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을 때 시계를 보니 새벽 한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하루 종일 사람들로 가득했던 대치동 거리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그날은 거리가 숨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학원 간판은 아직 몇 군데 켜져 있었다. 건물마다 층층이 형광등 불빛이 새어 나왔지만 이상하게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밝기는 충분했는데 차갑게만 보였다. 길 건너편에서 학원 건물을 바라보니 창문 너머로 아직 공부하는 학생들이 보였다. 고개를 숙인 채 문제집을 넘기는 모습이었다. 어떤 학생은 잠깐 창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솔직히 그때는 그런 장면을 매일 봤다. 학원 강사 생활을 하면서도 봤고, 운영을 하면서도 늘 보던 풍경이었다. 그런데 유독 그날은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도시 전체가 조용히 숨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학생들 표정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편의점 앞에 서 있던 학생들은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친구들끼리 장난도 치고 웃음소리도 들렸을 텐데 그날은 달랐다. 시험 기간이 가까워서였는지 피곤해서였는지 알 수 없었다. 다들 잠깐 쉬러 나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의외로 그런 모습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성적표를 받던 순간보다, 합격 소식을 들었던 순간보다, 편의점 앞에서 말없이 서 있던 학생들 표정이 먼저 떠오른다. 아마 그 나이에는 누구나 보이지 않는 짐을 하나씩 들고 있었던 것 같다. 나 역시 버티며 살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 나도 여유로운 사...

방과후 컴퓨터 수업이 학생들에게 인기였던 이유

이미지
“선생님, 오늘도 컴퓨터실 가는 거 맞죠?” 학교 복도에서 이런 말을 들으면 아이들 표정부터 달라졌다. 종이 울리기 전부터 문 쪽을 바라보던 학생들도 있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그런지 컴퓨터실은 아이들에게 조금 특별한 공간이었다. 늦은 오후 햇빛이 창문으로 길게 들어오던 날이 많았다.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으로 뛰어가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컴퓨터실 앞에는 늘 작은 줄이 만들어졌다.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들어가려는 아이들 때문에 복도가 시끌시끌해지곤 했다. 컴퓨터실 문이 열리던 순간 이상하게 아직도 기억나는 소리가 있다. 본체 전원 버튼을 누르면 들리던 "위잉" 소리다. CRT 모니터가 천천히 밝아지고 검은 화면 위에 글자가 하나씩 나타나면 아이들은 그것만으로도 신기해했다. 그 시절에는 집에 컴퓨터가 없는 학생이 적지 않았다. 컴퓨터를 만져볼 기회 자체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가방도 내려놓기 전에 자리에 앉았다. 어떤 학생은 친구 화면을 구경하러 다녔고, 어떤 학생은 마우스를 먼저 잡아보겠다고 손을 번쩍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닌 장면인데 그때는 작은 축제 같았다. 교실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 웃긴 건 평소 수업 시간에 졸던 학생들도 컴퓨터실에서는 눈이 반짝였다는 점이다. 교실에서는 조용하던 아이가 그림판을 켜면 가장 적극적으로 변하기도 했다. 이름을 크게 써서 꾸미고, 색을 바꾸고, 친구 얼굴을 흉내 내어 그림을 그리면서 깔깔 웃었다. 성장기 학생들을 상담하던 시절에도 느꼈지만 아이들은 억지로 시켜서 움직이는 것보다 스스로 재미를 찾을 때 훨씬 집중했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아마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느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커서 하나 움직이는 것도 신기했고, 화면 속에서 무언가가 바뀌는 것 자체가 재미였다. 나 역시 컴퓨터에 설레던 사람이었다 사실 나도 처음부터 컴퓨터를 잘 알았던 사람은 아니었다. 공장 야간근무를 하면서 야간학교를 다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