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운동장 트랙을 돌며 생각이 많아졌던 시절

이미지
곡선 구간을 지나 다시 직선으로 들어섰습니다. 조금 전에도 지나간 자리였는데 몇 바퀴를 돌고 나면 같은 곳이 또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운동장 트랙에서 달릴 때는 늘 그런 식이었습니다. 새벽이라 주변은 조용했습니다. 처음 몇 바퀴는 앞쪽을 보면서 달렸습니다. 몸이 아직 덜 풀렸을 때는 발을 옮기고 호흡을 맞추는 데 신경이 갔습니다. 그런데 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면 엉뚱하게도 낮에 해야 할 일이 머릿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운동하러 나온 사람의 몸은 트랙에 있는데 마음은 벌써 사무실에 가 있는 날이 있었습니다. 같은 자리를 돌면 같은 생각도 돌아왔습니다 마라톤을 준비하던 시절에는 강변에서도 뛰고 언덕에서도 연습했습니다. 운동장 트랙은 그런 곳과 느낌이 달랐습니다. 멀리 갔다가 다시 돌아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곡선과 직선이 이어진 같은 길을 계속 돌면 됐습니다. 함께 훈련하는 날에는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도 보게 됐습니다. 앞사람과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살피기도 하고 내 속도가 너무 빠르거나 느리지 않은지도 신경 썼습니다. 그러다 혼자 뛰는 날이면 그런 것에서 조금 자유로웠습니다. 내 속도로 달릴 수 있으니 편할 것 같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조용히 뛰다 보면 생각할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가 어제 끝내지 못한 일이 따라왔습니다. 한 가지 생각이 끝나는가 싶으면 사무실 일이 또 머리에 들어왔습니다. 몸은 앞으로 가는데 마음은 제자리였습니다 당시에는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찾아오는 사람이 줄어드는 날에는 운영비 걱정이 남았습니다. 하루가 바쁘게 지나간 날에도 미뤄 둔 일이 생각났습니다. 트랙을 돌면서 이런 방법은 어떨까, 저렇게 해보면 조금 나아질까 생각했습니다. 한참 생각하고 곡선 구간을 돌아 다시 직선으로 들어오면 조금 전 했던 고민을 또 하고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몸은 분명 계속 앞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머릿속에서는 같은 문제를 몇 바퀴씩 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첫차 기다리는 사람들 표정에서 묘한 공통점을 느꼈던 이유

새벽 네 시가 조금 넘은 천호동 골목은 낮에 보던 동네와 전혀 달랐습니다. 그때만 해도 주변에 논이 남아 있어서 겨울 새벽이면 골목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꽤 매서웠습니다. 집을 나설 때는 아직 한밤중처럼 깜깜했고, 가방을 메고 걷다 보면 제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습니다.

저는 그 시간에 종로 쪽 새벽 단과학원에 가기 위해 첫차를 탔습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니던 때였습니다. 거기에 새벽 공부까지 하려니 잠이 늘 부족했습니다. 그래도 대학에 가고 싶다는 마음 하나 때문에 졸린 눈을 비비며 정류장으로 걸어갔습니다.

가로등 아래 사람들이 하나둘 모였다

정류장에 도착하면 저보다 먼저 나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많은 사람이 서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 명이 오고, 조금 있다 또 한 명이 오면서 어느새 몇 사람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작업복 차림으로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사람도 있었고, 작은 가방을 가슴에 꼭 안고 있는 아주머니도 있었습니다. 밤새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인지, 저처럼 이제 하루를 시작하러 나온 사람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 시간에는 이상할 정도로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류장 기둥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서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입김이 하얗게 나올 때마다 어둠 속 얼굴이 잠깐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저도 그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아마 다른 사람이 저를 봤다면 저 역시 비슷한 얼굴이었을 겁니다. 가방을 메고 있으니 학생처럼 보였겠지만 속사정까지 알 수는 없었을 겁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녔고, 새벽에는 종로까지 공부하러 갔습니다.

잠을 충분히 잘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첫차에 타면 책이라도 조금 봐야겠다고 집을 나설 때마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버스 문이 열리고 따뜻한 안으로 들어가면 생각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빈자리에 앉아 책을 꺼내도 몇 장 넘기지 못하고 눈꺼풀이 무거워졌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졸다가 버스가 크게 흔들리면 깜짝 놀라 창밖부터 확인했습니다.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친 것은 아닌지 순간 가슴이 철렁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때는 진짜 피곤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힘들다는 생각을 오래 붙잡고 있을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종로에 도착하면 공부해야 했고, 또 하루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들 피곤했지만 자기 갈 곳은 있었다

첫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자주 보다 보니 어느 순간 묘한 공통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누구 하나 신이 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냥 나와 있었습니다.

추우면 손을 주머니에 넣었고, 졸리면 잠깐 눈을 감았습니다. 버스가 올 것 같은 불빛이 보이면 고개를 들었습니다. 서로 무슨 일을 하는지 묻지 않았고 어디까지 가는지도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피곤한 얼굴은 서로 달랐지만, 자기 갈 곳을 향해 서 있다는 모습만큼은 묘하게 비슷했습니다.

멀리서 첫차가 보이면 조용했던 사람들이 조금씩 움직였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줄이 만들어졌습니다. 버스가 멈추고 문이 열리면 차례대로 올라갔습니다. 교통비를 내고 각자 빈자리를 찾아 앉으면 정류장에서 함께 기다렸던 사람들도 다시 모르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때는 그 모습에서 무슨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제 하루를 살아내는 것만으로 바빴으니까요.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그 얼굴들이 떠올랐다

살다 보니 계획했던 대로 되지 않는 일이 참 많았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반드시 잘되는 것도 아니었고, 예상하지 못했던 일 때문에 다시 시작해야 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사업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런 날이면 의외로 화려하게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주 오래전 천호동 버스 정류장에서 만났던 이름 모를 사람들이 괜히 생각났습니다.

그 사람들도 저마다 사정이 있었을 겁니다. 생활비 때문에 일하러 가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가족을 위해 새벽부터 움직였던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밤새 일하고 이제야 집으로 돌아가던 사람도 있었겠지요. 당시에는 서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니 알 길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모습은 분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피곤해도 집을 나와 자기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름은 잊었는데 새벽 표정은 남아 있다

이제 그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라고 하면 제대로 기억할 수 없습니다. 이름은 애초에 알지도 못했습니다. 어디에서 내려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천호동 풍경도 그때와 많이 달라졌습니다. 논이 보이던 골목도 사라졌고, 새벽에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추운 날 이른 새벽에 밖에 서 있는 사람을 보면 가끔 그 시절 정류장이 겹쳐 보입니다.

희미한 가로등, 하얀 입김, 작업복 주머니에 들어가 있던 두 손, 버스가 오는 방향을 바라보던 피곤한 눈. 그리고 그 사이에 가방을 메고 서 있던 어린 시절의 저도 함께 떠오릅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시간에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첫차가 올 방향만큼은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도 그 조용한 새벽의 얼굴들은 좀처럼 기억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함께 보면 흐름이 더 잘 보입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중년이 되고 나서 새벽 일이 더 무겁게 느껴진 이유

대치동 학원가 새벽 불빛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던 날

새벽 편의점 앞 사람들 모습이 유난히 현실적으로 느껴졌던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