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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운동장 트랙을 돌며 생각이 많아졌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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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선 구간을 지나 다시 직선으로 들어섰습니다. 조금 전에도 지나간 자리였는데 몇 바퀴를 돌고 나면 같은 곳이 또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운동장 트랙에서 달릴 때는 늘 그런 식이었습니다. 새벽이라 주변은 조용했습니다. 처음 몇 바퀴는 앞쪽을 보면서 달렸습니다. 몸이 아직 덜 풀렸을 때는 발을 옮기고 호흡을 맞추는 데 신경이 갔습니다. 그런데 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면 엉뚱하게도 낮에 해야 할 일이 머릿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운동하러 나온 사람의 몸은 트랙에 있는데 마음은 벌써 사무실에 가 있는 날이 있었습니다. 같은 자리를 돌면 같은 생각도 돌아왔습니다 마라톤을 준비하던 시절에는 강변에서도 뛰고 언덕에서도 연습했습니다. 운동장 트랙은 그런 곳과 느낌이 달랐습니다. 멀리 갔다가 다시 돌아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곡선과 직선이 이어진 같은 길을 계속 돌면 됐습니다. 함께 훈련하는 날에는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도 보게 됐습니다. 앞사람과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살피기도 하고 내 속도가 너무 빠르거나 느리지 않은지도 신경 썼습니다. 그러다 혼자 뛰는 날이면 그런 것에서 조금 자유로웠습니다. 내 속도로 달릴 수 있으니 편할 것 같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조용히 뛰다 보면 생각할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가 어제 끝내지 못한 일이 따라왔습니다. 한 가지 생각이 끝나는가 싶으면 사무실 일이 또 머리에 들어왔습니다. 몸은 앞으로 가는데 마음은 제자리였습니다 당시에는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찾아오는 사람이 줄어드는 날에는 운영비 걱정이 남았습니다. 하루가 바쁘게 지나간 날에도 미뤄 둔 일이 생각났습니다. 트랙을 돌면서 이런 방법은 어떨까, 저렇게 해보면 조금 나아질까 생각했습니다. 한참 생각하고 곡선 구간을 돌아 다시 직선으로 들어오면 조금 전 했던 고민을 또 하고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몸은 분명 계속 앞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머릿속에서는 같은 문제를 몇 바퀴씩 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새벽 운동장 트랙을 돌며 생각이 많아졌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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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선 구간을 지나 다시 직선으로 들어섰습니다. 조금 전에도 지나간 자리였는데 몇 바퀴를 돌고 나면 같은 곳이 또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운동장 트랙에서 달릴 때는 늘 그런 식이었습니다. 새벽이라 주변은 조용했습니다. 처음 몇 바퀴는 앞쪽을 보면서 달렸습니다. 몸이 아직 덜 풀렸을 때는 발을 옮기고 호흡을 맞추는 데 신경이 갔습니다. 그런데 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면 엉뚱하게도 낮에 해야 할 일이 머릿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운동하러 나온 사람의 몸은 트랙에 있는데 마음은 벌써 사무실에 가 있는 날이 있었습니다. 같은 자리를 돌면 같은 생각도 돌아왔습니다 마라톤을 준비하던 시절에는 강변에서도 뛰고 언덕에서도 연습했습니다. 운동장 트랙은 그런 곳과 느낌이 달랐습니다. 멀리 갔다가 다시 돌아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곡선과 직선이 이어진 같은 길을 계속 돌면 됐습니다. 함께 훈련하는 날에는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도 보게 됐습니다. 앞사람과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살피기도 하고 내 속도가 너무 빠르거나 느리지 않은지도 신경 썼습니다. 그러다 혼자 뛰는 날이면 그런 것에서 조금 자유로웠습니다. 내 속도로 달릴 수 있으니 편할 것 같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조용히 뛰다 보면 생각할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가 어제 끝내지 못한 일이 따라왔습니다. 한 가지 생각이 끝나는가 싶으면 사무실 일이 또 머리에 들어왔습니다. 몸은 앞으로 가는데 마음은 제자리였습니다 당시에는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찾아오는 사람이 줄어드는 날에는 운영비 걱정이 남았습니다. 하루가 바쁘게 지나간 날에도 미뤄 둔 일이 생각났습니다. 트랙을 돌면서 이런 방법은 어떨까, 저렇게 해보면 조금 나아질까 생각했습니다. 한참 생각하고 곡선 구간을 돌아 다시 직선으로 들어오면 조금 전 했던 고민을 또 하고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몸은 분명 계속 앞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머릿속에서는 같은 문제를 몇 바퀴씩 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공장 식당 국물 냄새가 유난히 위로가 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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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쪽으로 걸어가다가 따뜻한 국물 냄새가 먼저 들어왔습니다. 그 냄새를 맡고서야 배가 고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계가 돌아가는 동안에는 밥 먹을 시간을 기다릴 여유조차 별로 없었던 때였습니다.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처음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시작한 일이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날이면 다른 생각을 할 틈이 많지 않았습니다. 눈앞의 일을 따라가며 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찼습니다. 배고픈 줄도 모르고 일하던 때였다 일하는 동안에는 기계가 계속 돌아갔습니다. 몸을 움직이고 해야 할 일을 따라가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잘 몰랐습니다. 식사 시간이 가까워졌다고 특별히 마음이 들뜨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일을 멈추고 식당 쪽으로 가면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일하던 자리에서 떨어져 식당으로 향하는 짧은 시간, 그리고 가까워질수록 느껴지는 음식 냄새가 있었습니다. 특히 따뜻한 국물 냄새가 나면 갑자기 속이 비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조금 전까지는 배고픈 것도 잊고 있었는데 그 냄새 하나가 몸을 먼저 깨우는 것 같았습니다. 말없이 밥을 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식당에는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별말 없이 자기 앞에 놓인 밥을 먹었습니다. 저도 빈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습니다. 그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거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날 어떤 반찬이 나왔는지도 흐릿합니다. 오래된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도 식판 위에 무엇이 놓여 있었는지까지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따뜻한 국물을 떠먹던 느낌만은 남아 있습니다. 일이 고된 날에는 밥을 먹으면서도 마음 한쪽이 급했습니다. 다 먹으면 다시 기계 앞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식사 시간이 넉넉하게 쉬는 시간이라기보다 잠깐 일을 멈춘 시간에 더 가까웠습니다. 국물 한 숟가락에 몸이 조금 풀렸다 그래도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으면 굳어 있던 몸이 조금 풀리는 듯했습니다. 식당에 들어오기 전까지 얼...

겨울방학이면 학원 복도 분위기가 달라졌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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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문이 열릴 때마다 두꺼운 겨울 외투가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학생들은 목도리를 풀면서 복도를 지나갔고, 젖은 운동화 바닥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도 가끔 들렸습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평소와 같은 학원인데도 복도의 움직임부터 달라졌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는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비슷한 시간에 몰려왔습니다. 방학이 되면 달랐습니다. 오전부터 오는 학생이 있었고 조금 늦게 나타나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하루 동안 학생들이 들어오는 시간이 제각각이 되면서 복도에도 빈 시간과 붐비는 시간이 섞여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학원에 오는 아이들이 있었다 오전에 들어오는 학생들을 보면 학교 다닐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 보였습니다. 집에서 늦게 일어나 급하게 나온 듯 머리가 눌린 학생도 있었습니다. 가방 안에 문제집을 여러 권 넣어 가지고 오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다음 수업까지 시간이 남으면 복도 의자에 앉아 기다렸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으니 시간이 조금 넉넉할 것 같았지만 아이들의 얼굴까지 모두 여유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학생은 가방을 옆에 두고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었습니다. 또 어떤 학생은 다음 수업을 기다리며 조용히 자기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같은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었지만 하루를 보내는 모습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복도 끝에 그냥 서 있던 학생 한 학생이 기억에 남습니다. 교실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복도 끝에 잠시 서 있었습니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보였습니다. 오전부터 여러 수업을 다니다가 온 것인지, 추운 밖에서 들어와 몸이 아직 굳어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괜히 짐작해서 묻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학생 가까이에 의자를 끌어다 놓았습니다. 잠시 앉아 쉬게 하고 스스로 움직일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학원을 운영하면서 학생들을 오래 만나다 보니 무슨 일이냐고 계속 묻는 것보다 그냥 조금 기다려주는 편이 나아 보이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방학이 되면 어른들의 마음도 바빠졌다 겨울방학이 ...

장바구니 물가를 보며 예전과 다르다고 느껴졌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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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을 마치고 영수증을 받아 들었는데 바로 주머니에 넣지 못했습니다. 찍혀 있는 금액을 한번 더 봤습니다. 장바구니 안에도 다시 눈이 갔습니다. 특별히 많이 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금액이 크게 느껴졌습니다. 무엇을 잘못 계산했나 싶어 물건을 하나씩 바라봤습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하나하나 가격을 다시 따져본 것은 아닙니다. 영수증을 접어 주머니에 넣고 장바구니를 챙겼습니다. 아주 평범한 장보기였는데 그날은 계산대 앞에서 잠깐 멈추게 됐습니다. 생활비 걱정은 전에도 늘 있었다 돈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한 것은 아닙니다. 작은 사무실을 운영할 때도 돈 걱정은 늘 따라다녔습니다. 임대료와 여러 고정비가 먼저 생각났고, 사무실이 조용한 날에는 돈을 쓰는 일도 자연스럽게 조심하게 됐습니다. 그래도 집에서 먹고 쓰는 물건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생활비라고 생각했습니다. 평소 사던 것을 사고 필요한 것을 채우는 일이니 대충 이 정도 들겠다는 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감이 자꾸 빗나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비슷하게 담았다고 생각했는데 계산할 때 받는 느낌은 전과 달랐습니다. 물건을 들었다가 가격을 한번 더 봤다 장을 보는 행동도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필요한 물건을 집었다가 가격을 한번 더 보게 됐습니다. 꼭 지금 사야 하는지 잠깐 생각하는 일도 생겼습니다. 예전에는 별생각 없이 장바구니에 넣었던 물건도 손에 든 채 잠시 망설였습니다. 무엇이 얼마에서 얼마로 올랐는지 숫자로 적어가며 비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물가를 따져본 기억보다 물건 하나를 집을 때 생긴 짧은 망설임이 더 또렷합니다. 계산대에서 금액을 확인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많이 산 것 같지 않은데 예상보다 부담스럽게 느껴지면 장바구니를 다시 보게 됐습니다. 특별한 물건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아끼겠다는 말보다 행동이 먼저 달라졌다 가족과 함께 생활하다 보면 이런 변화는 거창한 말보다...

하루 두 가지 일을 하며 몸보다 마음이 지쳤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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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동을 끄자 차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조금 전까지 들리던 도로 소리도 멀어진 것 같았습니다. 이제 집에 들어가 씻고 누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울렸습니다. 화면을 확인하니 다음 날 챙겨야 할 연락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차 문을 바로 열지 못했습니다. 휴대전화를 손에 든 채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몸은 오늘 일을 끝냈는데 머릿속에서는 벌써 내일 일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하루에 두 가지 일을 함께 하던 시절에는 이런 순간이 자주 있었습니다. 한가한 날이 오히려 마음은 더 바빴다 낮에는 사무실 일을 챙겼습니다. 예약이 있는 날에는 시간을 맞춰 사람을 만나고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습니다. 바쁜 날은 몸은 힘들어도 생각할 틈이 적었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없는 날이 문제였습니다. 사무실이 하루 종일 조용하면 괜히 휴대전화를 몇 번씩 들여다봤습니다. 벨이 울린 것도 아닌데 화면을 켜보고, 혹시 연락을 놓친 것은 아닌지 확인했습니다. 전화가 오면 반가웠습니다. 아무 연락 없이 시간이 흘러가면 마음이 조금씩 무거워졌습니다. 임대료도 생각났고 생활비도 생각났습니다. 사무실에 사람이 없다고 해서 나갈 돈까지 함께 멈추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일만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일을 함께하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놓일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몸이 좀 힘들더라도 움직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밤이 되면 전혀 다른 하루가 시작됐다 두 번째 일을 시작하면 주변 풍경부터 달라졌습니다. 낮에 사무실에서 보던 사람들의 얼굴 대신 밤거리의 간판과 자동차 불빛을 보게 됐습니다. 낮의 일이 끝났다고 해서 하루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식사 시간을 놓치는 날도 있었습니다. 차 안에서 간단한 것으로 배를 채우고 다시 움직였습니다. 늦은 밤 거리를 다니다 보면 저처럼 아직 하루를 끝내지 못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보였습니다. 편의점 앞 작은 탁자에서 컵라면을 먹는 사람...

첫차 기다리는 사람들 표정에서 묘한 공통점을 느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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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네 시가 조금 넘은 천호동 골목은 낮에 보던 동네와 전혀 달랐습니다. 그때만 해도 주변에 논이 남아 있어서 겨울 새벽이면 골목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꽤 매서웠습니다. 집을 나설 때는 아직 한밤중처럼 깜깜했고, 가방을 메고 걷다 보면 제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습니다. 저는 그 시간에 종로 쪽 새벽 단과학원에 가기 위해 첫차를 탔습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니던 때였습니다. 거기에 새벽 공부까지 하려니 잠이 늘 부족했습니다. 그래도 대학에 가고 싶다는 마음 하나 때문에 졸린 눈을 비비며 정류장으로 걸어갔습니다. 가로등 아래 사람들이 하나둘 모였다 정류장에 도착하면 저보다 먼저 나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많은 사람이 서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 명이 오고, 조금 있다 또 한 명이 오면서 어느새 몇 사람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작업복 차림으로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사람도 있었고, 작은 가방을 가슴에 꼭 안고 있는 아주머니도 있었습니다. 밤새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인지, 저처럼 이제 하루를 시작하러 나온 사람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 시간에는 이상할 정도로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류장 기둥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서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입김이 하얗게 나올 때마다 어둠 속 얼굴이 잠깐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저도 그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아마 다른 사람이 저를 봤다면 저 역시 비슷한 얼굴이었을 겁니다. 가방을 메고 있으니 학생처럼 보였겠지만 속사정까지 알 수는 없었을 겁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녔고, 새벽에는 종로까지 공부하러 갔습니다. 잠을 충분히 잘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첫차에 타면 책이라도 조금 봐야겠다고 집을 나설 때마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버스 문이 열리고 따뜻한 안으로 들어가면 생각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빈자리에 앉아 책을 꺼내도 몇 장 넘기지 못하고 눈꺼풀이 무...

비 오는 날 달리기 연습이 더 힘들게 느껴졌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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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사람보다 물이었습니다. 가장자리에는 작은 웅덩이가 생겨 있었고, 트랙 위에도 빗물이 얇게 번져 있었습니다. 비가 아주 세게 내리는 날은 아니었지만 우산 없이 오래 서 있으면 옷이 금방 젖을 정도였습니다. 평소 같으면 운동장을 몇 바퀴 돌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을 텐데 그날은 이상할 만큼 한산했습니다. 처마 밑에서 잠깐 비를 바라봤습니다. 그냥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한 번도 안 뛰고 가기는 또 아쉬웠습니다. 결국 운동화 끈을 다시 조여 매고 천천히 운동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오히려 시원해서 괜찮았다 처음 몇 바퀴는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얼굴에 떨어지는 빗물이 시원하게 느껴졌고, 사람도 거의 없어서 제 발소리만 들으며 달릴 수 있었습니다. 평소와 조금 다른 분위기가 오히려 재미있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운동복이 젖으면서 몸에 달라붙기 시작했습니다. 양말에도 서서히 물기가 들어왔습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운동화 안에서 축축한 느낌이 났습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한 번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니 계속 발 쪽으로 마음이 갔습니다.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밟던 운동장 바닥도 그날은 자꾸 내려다봤습니다. 혹시 미끄러지지는 않을까 싶어 발을 조금 더 조심스럽게 디뎠습니다. 속도를 내는 것보다 넘어지지 않는 게 먼저였습니다. 말없이 마주친 사람도 비슷한 얼굴이었다 운동장을 돌다가 다른 사람 한 명과 마주쳤습니다. 그 사람도 비를 맞으면서 뛰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지나갈 때 서로 한번 웃었습니다. 무슨 말을 주고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표정만 봐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몇 바퀴가 지나자 그 사람은 먼저 운동장을 빠져나갔습니다. 저도 그 모습을 보고 순간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누가 시킨 운동도 아니었습니다. 그...

겨울 야간조 끝나고 버스 정류장에 모이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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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문을 나서던 순간이 아직도 이상하게 또렷합니다. 안에서는 기계 열기 때문에 추운 줄도 몰랐는데, 밖으로 한 발 내딛자 안경에 하얗게 김이 서렸습니다. 손끝은 금세 얼얼해졌고, 작업복 지퍼를 목까지 올린 뒤 두 손을 주머니 깊숙이 넣었습니다. 하루 종일 귀를 채우던 기계 소리는 멀어지고, 그 자리에 차가운 겨울바람 소리가 들어왔습니다. 공장 문이 열리면 사람들이 한꺼번에 나왔다 야간조가 끝나는 시간에는 퇴근하는 사람들이 거의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낮에는 각자 맡은 자리에서 바쁘게 일하던 사람들이었지만, 밖으로 나오면 모두 비슷한 얼굴이 됐습니다. 피곤했고, 배도 고팠고, 무엇보다 빨리 집에 가고 싶은 표정이었습니다. 버스 정류장은 금세 작업복 차림의 사람들로 찼습니다. 기름때가 조금 묻은 옷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낡은 가방 안에 빈 도시락통을 넣어 들고 나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한 사람들은 의자가 비면 말없이 먼저 앉았습니다. 누군가는 담배를 피웠고, 누군가는 두 손을 비비며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참 신기했던 게, 평소 말이 많던 사람들도 그 시간만 되면 조용해졌습니다. 일을 하면서는 그렇게 농담을 많이 하던 사람도 정류장에서는 버스 오는 방향만 바라봤습니다. 특별히 말하지 않아도 서로 피곤한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멀리 불빛만 보여도 모두 고개를 들었다 버스가 늦어지는 날이면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여기저기서 손목시계를 확인했고, 누군가는 작은 목소리로 "오늘은 왜 이렇게 안 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옆에 있던 사람이 대답 대신 고개만 한번 끄덕였습니다. 멀리서 불빛이 나타나면 다들 거의 동시에 도로 쪽을 바라봤습니다. 버스인가 싶어 몸을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가 다른 차라는 걸 알면 다시 어깨를 움츠렸습니다. 그런 움직임이 몇 번씩 반복됐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닌 장면인데 이상하게 아직 기억납니다. 솔직히 그때는 버스 몇 분 늦는 것도 크게 느껴졌습니다. 집에 도착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