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차 기다리는 사람들 표정에서 묘한 공통점을 느꼈던 이유
그 시절 생활 현장 기록 화려한 성공 이야기는 없습니다. 공장 야간근무를 하던 시절, 야간학교를 다니던 날들, 컴퓨터 학원 강사와 원장으로 살아온 시간, 대치동 학원가의 밤 풍경, 김포 신도시가 막 만들어지던 모습, 마라톤 현장과 코로나 시절의 거리까지. 이 블로그는 한 사람이 직접 살아오며 보고 느꼈던 생활 현장의 기록입니다. 새벽 버스정류장의 공기, 늦은 밤 학원 복도의 정적, 생활비를 계산하던 식탁 위의 풍경, 먹고살기 위해 버티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정보를 설명하기보다 그 시절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해하게 된 생각들을 기록합니다. 학원 이야기, 공장 이야기, 마라톤 이야기, 새벽 거리 이야기, 중년 노동 이야기, 생활비 고민 이야기까지.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지나쳐온 평범한 일상을 천천히 남겨보려 합니다.
운동장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사람보다 물이었습니다. 가장자리에는 작은 웅덩이가 생겨 있었고, 트랙 위에도 빗물이 얇게 번져 있었습니다. 비가 아주 세게 내리는 날은 아니었지만 우산 없이 오래 서 있으면 옷이 금방 젖을 정도였습니다. 평소 같으면 운동장을 몇 바퀴 돌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을 텐데 그날은 이상할 만큼 한산했습니다.
처마 밑에서 잠깐 비를 바라봤습니다. 그냥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한 번도 안 뛰고 가기는 또 아쉬웠습니다. 결국 운동화 끈을 다시 조여 매고 천천히 운동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처음 몇 바퀴는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얼굴에 떨어지는 빗물이 시원하게 느껴졌고, 사람도 거의 없어서 제 발소리만 들으며 달릴 수 있었습니다. 평소와 조금 다른 분위기가 오히려 재미있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운동복이 젖으면서 몸에 달라붙기 시작했습니다. 양말에도 서서히 물기가 들어왔습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운동화 안에서 축축한 느낌이 났습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한 번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니 계속 발 쪽으로 마음이 갔습니다.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밟던 운동장 바닥도 그날은 자꾸 내려다봤습니다. 혹시 미끄러지지는 않을까 싶어 발을 조금 더 조심스럽게 디뎠습니다. 속도를 내는 것보다 넘어지지 않는 게 먼저였습니다.
운동장을 돌다가 다른 사람 한 명과 마주쳤습니다. 그 사람도 비를 맞으면서 뛰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지나갈 때 서로 한번 웃었습니다. 무슨 말을 주고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표정만 봐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몇 바퀴가 지나자 그 사람은 먼저 운동장을 빠져나갔습니다. 저도 그 모습을 보고 순간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누가 시킨 운동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멈추고 집에 가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 바퀴만 더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달렸는데 평소 같으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한 바퀴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습니다. 몸이 아주 힘든 것도 아닌데 끝이 멀게 느껴졌습니다.
그날 달리기가 힘들었던 건 단순히 체력이 떨어져서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젖은 옷도 신경 쓰였고, 발밑도 계속 살펴야 했습니다. 빗물이 눈가로 흘러내릴 때마다 손등으로 닦았습니다. 자동차가 젖은 도로를 지나갈 때 나는 소리도 평소보다 크게 들렸습니다.
달리는 일 하나에만 마음을 두기가 어려웠습니다. 평소에는 호흡과 발걸음에만 신경 쓰면 됐는데 그날은 자꾸 다른 것들이 끼어들었습니다. 운동화 안의 물기, 미끄러운 바닥, 젖은 소매, 얼굴에 떨어지는 빗방울까지 하나하나 마음을 건드렸습니다.
몸은 조금 더 갈 수 있는데 마음이 먼저 "이제 그만하자."고 말하는 날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무리해서 끝까지 버텨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몇 바퀴를 더 돌다가 결국 운동을 마쳤습니다. 평소 기록과 비교하면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날은 기록도 거리도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운동화가 흙과 빗물로 엉망이 돼 있었습니다. 양말까지 축축하게 젖어서 걸을 때마다 불편했습니다. 집에 들어와 신발을 벗고 현관에 내려놓았는데 그 모습을 보니 괜히 웃음이 났습니다.
좋은 기록을 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달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비를 맞으며 운동장을 몇 바퀴 돈 게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맑은 날 평범하게 달렸던 날보다 오히려 그날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참 신기했던 게, 힘들었던 기억인데도 싫은 기억으로 남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거의 없는 운동장, 바닥을 두드리던 빗소리, 저 혼자 따라오던 발소리가 묘하게 조용했습니다. 평소 사람들로 북적이던 운동장과는 완전히 다른 곳처럼 느껴졌습니다.
예전에는 운동하러 나가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비가 와도, 몸이 무거워도 일단 나가야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도 조금 달라졌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이나 몸 상태가 애매한 날에는 쉬어가는 것도 필요하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됐습니다.
그렇다고 그날 비를 맞으며 달린 일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오래 뛰지도 못했고 기록도 남지 않았지만, 그날의 운동장은 다른 방식으로 기억 속에 남았습니다.
요즘도 비가 운동장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면 가끔 그때 모습이 떠오릅니다. 운동화 속까지 물이 들어왔는데도 한 바퀴만 더 돌겠다며 천천히 뛰던 모습입니다. 비 때문에 텅 빈 운동장에 제 발소리만 남아 있던 그 시간은 지금도 아주 조용하게 생각납니다.
함께 보면 흐름이 더 잘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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