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요금 고지서를 보고 현실이 달라졌다고 느낀 날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시절에는 컴퓨터 공부가 당장 내 삶을 바꿔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그냥 주변에서 앞으로는 컴퓨터 모르면 힘들어진다는 말을 자꾸 했다. 그런데 나는 낮에는 군대에서 주어진 일하고 밤에는 빵카 보초 근무까지 서고 있었으니까, 몸이 늘 피곤했다. 겨울에는 손끝이 얼 정도로 추웠고, 새벽 공기는 이상하게 더 길게 느껴졌다. 그런 상황에서 무슨 공부냐 싶을 때도 많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작은 컴퓨터 책 한 권은 늘 가방 안에 들어 있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계속 들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참 신기하다.
빵카 보초 근무라는 게 화려한 일은 아니었다. 밤새 조용한 곳 지키면서 시간 보내는 일이었다. 가끔 바람 소리만 들리고, 멀리 새보초 교재하는 소리 등이 희미하게 들릴 때가 있었다. 그 시간에는 괜히 별생각이 다 나기도 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컴퓨터 공부를 왜 시작했는지도 정확히 몰랐다. 대단한 꿈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계속 지금처럼 기계만지는 공장 생활을 계속 하면서 살게 될까 봐 답답했던 마음이 더 컸다. 몸은 피곤한데 마음은 더 복잡했다.
그래서 근무 중 조용한 시간 생기면 손전등 켜놓고 컴퓨터 책을 펼쳤다. 전산개론, 코볼, 포트란, 어쎔블리 명령어 같은 게 적혀 있었는데 영어도 많고 낯선 단어투성이였다. 여러번 읽어 보아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 줄이라도 더 읽고 싶었던 날이 있었다. 이해는 안 되는데 덮고 싶지는 않은 그런 느낌. 막상 해보니까 공부라는 게 꼭 재미있어서 하는 건 아니더라. 그냥 마음이 멈추지 않게 하려고 붙잡고 있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나중에 컴퓨터 학원 다니기 시작하면서 더 많이 느꼈다. 그때는 컴퓨터 배우러 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지금처럼 익숙하지 않았다. 공장 다니던 사람, 야간학교 다니던 사람, 취업 때문에 학원 온 사람들까지 다들 비슷했다.
참 신기했던 게 있다. 다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데, 속으로는 긴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8비트 컴퓨터에 이어서 윈도우 환경에서는 마우스를 책상 위에서 들고 움직이는 사람도 있었고, 저장 안 하고 꺼버려서 다시 처음부터 하는 사람도 많았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플로피디스크 방향 헷갈려서 몇 번을 다시 넣었고, 엔터키 누르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잘못 누르면 컴퓨터 고장 나는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웃기지는 이야기 지만, 그 시절에는 진짜 다들 그렀게 컴퓨터 공부를 랬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가끔 생각한다. 몸은 늘 피곤했고 현실은 금방 달라지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컴퓨터 관련 공부를 하고 나면 마음이 조금 덜 답답했다.
다음날 또 같은 근무를 서야 했고, 졸린 눈으로 군대 업무도 처리해야 했다. 달라진 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컴퓨터 공부를 아예 놓고 살던 때보다는 덜 막막했다. “나도 뭔가 배우고 있다”는 구런 느낌 하나가 사람 마음을 꽤 안정적으로 붙잡아줬다.
그 시절에는 결과를 빨리 보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요즘처럼 몇 달 만에 인생 바뀌는 성공담 같은 것도 별로 없었다. 그냥 천천히 익히고, 조금씩 따라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학원 강사 하면서 학생들 가르킬 때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빨리 잘하는 사람보다 그냥 포기 안 하고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더 대단하다고. 그건 내가 직접 겪어봤으니까 안다.
시간 지나고 보니까 남는 건 컴퓨터 기술 이름보다 그때 사람들이었다. IMF 지나고 재교육 받으러 오던 아저씨들, 아이들 학원 보내고 인터넷 배우러 오던 주부들, 자격증 하나 따보겠다고 밤 늦게까지 남아 있던 학생들.
다들 사정 하나씩은 간직하고 있었다. 먹고살려고 배우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교실 분위기도 지금과는 좀 달랐다. 경쟁이라기보다 같이 버티는 그런 느낌이 있었다.
나도 온라인 교육 같은 걸 나중에 해보면서 실패를 겪었는데, 그때마다 예전 생각이 났다. 결국 사람은 완벽해서 버티는 게 아니라, 조금 답답해도 계속 이어가면서 버티는 것 같다는 생각.
가만히 생각해보면 빵카 보초 근무 중에도 컴퓨터 공부를 놓지 않았던 이유는 성공하려고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내 삶이 그대로 멈춰 있는 느낌이 싫었던 것 그런거다.
지금도 오래된 컴퓨터 책이나 플로피디스크 같은 걸 보면 그 시절 공기 냄새가 떠오른다. 추운 새벽, 졸린 눈, 손전등 불빛 같은 것들. 결국 그 기억 안에는 기술보다 사람이 더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
함께 보면 흐름이 더 잘 보입니다.
댓글
댓글 쓰기